개학 후 두번째 일요일이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온 재석은 거실 쇼파에 널부러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양팔을 휘휘 저어 TV 리모콘을 수색했다. 몸의 직감은 정확했다. 몇초 걸리지 않아 묵직한 것이 손 안에 감겼다. TV 리모콘이었다. 전원을 켜고 본능적으로 채널을 돌리다 멈췄다. 런닝맨 본방이 방송되고 있었다. 재석은 원래 이 시간에 집에 오면 늘 1박 2일을 보곤 했다. 오늘 채널을 돌리다 런닝맨에서 멈춘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게스트로 출연한 에이핑크 멤버 나은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그순간 초단위로 돌아가던 TV의 채널과 맞아 떨어진 것이다. 나은의 덕후인 재석에게 내린 우연의 선물이었다. 재석은 망연히 빠져들었다. 다른 멤버들에게 쫒기고 쫒으며 숨을 헐떡이고 깔깔대는 나은을 보는 재석의 마음은 충만한 덕심으로 은혜로웠다.
대게 이런 일상의 은혜로움은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언제나 이를 시기한 악마가 훼방을 놓는다. 그날의 훼방꾼은 명수였다. 명수는 같은 과 동기다. 재석과 명수는 신입생 오티 때 처음 만나 단짝이 됐다. 정확히 말하면 단짝은 아니다. 명수에게 재석은 없어선 안 될 친구이고 재석에게 명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친구다. 말하자면 암묵적 갑을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명수는 재석에게 뭔가를 얻어야 할 때 카톡을 보냈다.
과제는 다 했냐?
명수가 보낸 이 한줄의 카톡은 평온했던 일요일 밤을 깨뜨렸다. 재석은 답톡을 즉각 보냈다.
무슨 과제??
재석이 보낸 톡 앞에 붙어있던 숫자 1은 즉각 0으로 바뀌었다. 재석 역시 폰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명수가 다시 답톡을 단답형으로 보냈다.
자료구조 수업
큰일났다. 재석은 그제서야 생각났다. 오늘밤 자정까지 조교 이메일로 제출해야 할 과제를 잊고 있었다.
아니.
재석이 톡을 보내자 명수는 바로 반응했다.
헉. 너답지 않게 뭐냐? 다 하면 톡으로 보내라.
늘 이런 식이다. 명수는 재석의 과제를 베껴서 낸다. 이번엔 명수가 아니었다면 과제를 못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재석은 처음으로 명수의 존재를 감사했다.
재석은 착실한 대학생이다. 과제를 잊어 빼먹거나 시험 범위를 착각하거나 해서 망친 과목이 없었다. 과제가 나오면 미루지 않고 재깍 해치우는데 오늘 같은날은 처음이라 재석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재석은 몰랐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