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몇 번 째인지는 모르겠다. 읽을 게 없거나 한 사람이 생각날 때면 책장에서 꺼내 본다. 책 좀 좋아한다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읽어본다는 책이 있다면 <데미안>은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는 책일 것이다. 나는 처음 읽을 때 중간에 포기했었다. 15살의 나에게 어렵기도 했고 재미도 없었다. 어려웠던 건 내용도 내용이지만 세로 쓰기로 인쇄된 옛날 책이었던 이유가 컸던 것 같다. 그래도 애써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다. 그건 빌려 읽는 책이어서였다. 빌려준 사람은 누나라고 불렀던 선생님이었다. 지금 만나게 된다면 아직 누나라고 부를 것 같다. 누나는 내가 고입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하게 해줬고 국어, 영어, 수학을 가르쳐주셨다. 교과서와 참고서를 구해 주셨고 연습문제 풀이도 도와주셨다. <데미안>을 빌려주실 때 아끼는 책이라고 하셨다. 나는 책을 돌려줄 때 다 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어려워서 읽다 말았다는 말을 하기가 싫었다. 그날 나는 처음 누나에게 질책을 들었다. 누나는 자주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광호야, 넌 다른 사람들보다 세 배나 열심히 해야 해.
그때 난 이 말의 진짜 의미를 몰랐다. 단순히 3년치 과정을 1년에 끝내야 한다는 말로 이해했었다. 그때의 나에겐 뭔가를 알아간다는 게 즐거움이었고 어디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게 공포였다. 밤마다 잠들기 전 누워서 오늘 뭐했나를 복기하고 내일 공부해야 할 내용이 뭔지 생각할 때가 가장 좋았다. 누나는 삼각함수를 공부할 때 쯤 나에게서 떠나가셨다. 그후로 오래 편지로 근황을 주고받다가 오래전 소식이 끊겼다. 가끔 넘 보고싶다. 정말 고마웠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런데 지금의 내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