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8. 살고싶다는 농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돌아온 사람은 그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허지웅 작가의 글이 예전과 다르다. 그가 달라졌을 수도 내가 달라졌을 수도 아니면 둘 다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죽은 것들이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의 글이 온순해졌다. 예전의 치기어린 당당함과 날선 직설 같은 글이 아니다. 나는 그런 그의 글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글이 싫어진 건 아니다. 다만 아쉽고 그리울 뿐이다. <살고싶다는 농담>에서 그는 남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말한다. 이 일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었다고 간증한다. 정말 이건 진실이다. 나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얼마나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지 알고있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피혜의식과 결별하라.”

그에게 이 책에서 한 문장만 고르라고 협박한다면 아마도 그는 주저없이 이 문장을 고를 것이다. 피혜의식과 결별하기란 쉽지않다. 그것은 곧 이전의 삶을 버리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와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해야 한다. 모두가 피혜의식을 가슴속에 끓어않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옥인 세상은 더 극심한 지옥이 될 것이다.

우리는 힘들 때 죽고싶다는 말을 진담으로 하고 많은 이들이 그 말을 실행으로 옮기는 세상을 살고있다. 그가 제목을 <살고싶다는 농담>으로 붙인 건, 이들이 살고싶다는 말을 간절한 소망이 아닌 농담처럼 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 같다.

허지웅 작가. 살고싶다는 농담

지금 막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다. 허지웅 작가의 연상 단어는 철학자 니체다. 니체는 그가 사랑해마지 않은 철학자다. 만약 니체가 오늘날 태어나 살아간다면 허지웅일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니체가 살아 활동하던 시대에 인터넷이 존재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각과 글에 감명받고 깨달아 세상은 지금보다 좋아졌고 니체의 말년은 미치광이로 비참해지지 않았을 텐데. 하나마나한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허지웅 작가의 심신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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