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한낮의 교회엔 절박함이 있다.
듬성듬성 홀로 앉아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속에 있는 절박함이 보인다.
모두 가슴속에 절박함 하나씩은 품고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처럼 특별 연주가 예고없이 있는 날이 좋다.
찍고 있느라 오롯이 감상할 수 없었다.
목사님 설교말씀보다 첼로와 바이올린 소리에 위로받는 날이 있다.
Forget what I've wrote event if (I say) true
수요일 한낮의 교회엔 절박함이 있다.
듬성듬성 홀로 앉아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속에 있는 절박함이 보인다.
모두 가슴속에 절박함 하나씩은 품고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처럼 특별 연주가 예고없이 있는 날이 좋다.
찍고 있느라 오롯이 감상할 수 없었다.
목사님 설교말씀보다 첼로와 바이올린 소리에 위로받는 날이 있다.
엄마와 협상을 시도했다.
엄마. 이제부터 반찬 투정 안 할테니까 용돈 좀만 주세요.
과연 결과는?
내가 인스타 폐인이 된 여러 이유 중에 하나는 냥이와 댕댕이 때문이다. 알음알음 팔로우하고 있는 냥이와 댕댕이 계정만 10개에 가깝다. 냥이와 댕댕이를 좋아하지만 여건상 함께 살 수 없는 나에게 이들 계정은 소소한 행복을 준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 피드에서 잘 보이지 않으면 병이 들었나, 혹여 무지개 다리를 건너갔나 하는 걱정을 주기도 한다. 모든 냥이와 댕댕이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때때로 계정주이자 집사에 대해 알고싶어지기도 하지만 단념하곤 한다. 그저 랜선 집사로만으로도 좋다. 아래는 내가 아끼는 냥이와 댕댕이 계정의 스샷이다. 계정 아이디와 이름, 그밖의 정보가 될 만한 것들은 가렸다. 계정주의 허락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고 오래도록 나만 알고싶은 계정이기 때문이다.
오늘 영화 보러 안 갔다면 여자친구 데뷔 5주년 모르고 지나갔을거야. 미안해 ㅠ
Flex해버렸지 뭐야는 이럴 때 쓰는 말인가?
학식 후엔 바나나우유가 진리였어.
이번주는 망언, 실언, 비하 발언 기사만 보인 것 같다. 기사의 인물은 실수였다,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진 몰랐다며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문제는 발언이 아니다. 감성의 문제다. 내가 이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를 생각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발언들을 들여다보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감성엔 결함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이 있다.
1. 몸도 불편한데 책도 내고 대단하시네요.
이 말은 여자인데 공부도 잘하고 대단하시네요. 라는 말과 같다.
2. 이 사람은 왜 우리 모임에 나오는거야?
'이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묻는 건 나는 이 사람과 다른 분류야,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3. 이 사람은 이거 싫어하지 않아?
발언의 당사자를 3자화하는 질문. 앞에서 듣는 '이 사람'은 듣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런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싫다.
서점에서 <하버드 부자 수업>을 찾아보다가 <부자의 독서>를 발견했다. 이 책이 더 끌렸으나 둘 다 사지 않고 장바구니에만 담았다. 부자가 되고싶다.
문짝이든, 사람이든, 다른 무엇이든 당기는 건 넘 어려워.
손잡이 옆에 '당기시오'라고 자그맣게 붙어있다.
쫌더 당겨서 찍고 싶었으나 내 손이 똥손인 관계로 이정도가 최선이었다.
어제 엄마가 이걸로 맛있는 거 사먹으라며 카드를 주셨다.
이때 아들로서 보였어야 할 올바른 반응은, 아닙니다. 나이가 몇살인데 엄카를 씁니까 하면서 거절하는 것일까. 아니면 감사합니다. 하면서 넙죽 받아 쓰는 것일까.
나는 후자라 생각한다. 엄마도 그걸 원하실 거라 생각하고 오늘은 엄마 카드로 밥을 사먹었다.
엄마가 외가 가족 모임 때문에 경주에 가셨다.
지금 집엔 나 혼자다.
누굴 불러서 밤새 같이 놀고 싶다.
배달음식 시켜 먹으면서 영화 보고 게임기로 게임도 하고
그러다가 잠오면 아무나 먼저 잠들기.
이렇게 같이 놀 수 있는 서람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